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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청 긴급취재 2부_안성 3.1 만세운동 주도한 권번 기생들
군중 천 여명과 함께 태극기 들고 관공서 쳐들어가 만세운동 주도
김미연기자 기사입력  2021/02/27 [20:08]

[국악디지털신문=김미연기자] 만세운동 주도한 19살 개화기 신여성 기생 변매화

변매화는 당시 안성권번조합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한성(=서울) 권번(券番) 꽃스물에 일지매화(一枝梅花) 피어 있어, 백화란만(百花爛漫) 붉은 중에 맑은 향기 자랑하다가 봄소식을 전하려고 안성조합으로 옮겨오니운운하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한성권번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원적이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장기리 373번지로 되어 있고 당시 안성권번에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안성에서 나고 자란 안성기(安城妓)임이 분명하다. 장기리(場基里)는 조선시대 이래 안성장이 들어섰던 지금의 창전동 성남동 일대를 이르는 옛 지명이다. 방년 19살의 꽃다운 나이이니 기녀로서는 절정기에 달했을 때의 사진이다.

 

▲ 한성권번 출신 변매화는 안성에서 태어나 자란 ‘청루미인’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 명장 운정 김경희 선생의 민화로 되살아난 변매화.    

사진 왼쪽에는 기녀가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는 기예의 종류를 소개하고 있는데, 가무, 시조, 경기·서도·남도잡가, 각종 정재악, 검무, 승무, 양금(楊琴) 그리고 능화매국(能畵梅菊, 매화 국화를 능숙히 그림)을 꼽고 있다. 사진 아래에는 시조의 형식을 빌려, 청루미인(靑樓美人) 변매화가 안성권번으로 돌아오니 탐화봉접 때를 만나 날아들고 모여든다고 특기하여 당시 안성장기(場基)에서 큰 인기를 끌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다소곳한 한복 차림에 양산과 신식 손가방을 장신구 삼아 들고 서 있는 맵시가 개화기 신여성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퍽 세련되었다.

▲ 송계화. 변매화처럼 안성에서 자랐다.   
▲ 고비연. 경성[서울] 출신으로 전해진다.   

 

▲ 강련화. 진주 출신으로 알려진다. 아마 그곳 권번에서 올라온 것으로 추정된다.    

 

▲ 리봉선. 강련화와 같은 진주 출신. 친구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 조선미인보감.  

 ‘조선미인보감 ’은 일본어로 발행된 조 선총독부의 기관지 경성신문사(京城新 聞社)의 사장이었던 아오야나기 고타 로(靑柳網太郞)가 1918년에 쓰고, 경성부(京城府) 봉래정(蓬萊町)의 조선 연구회(朝鮮硏究會)에서 펴냈다.

 

이 책에는 1910년대 안성의 두 권번(券番) 장기리권번과 동리권번에 소속된 5명의 사진이 비교적 자세한 소개와 함께 나와 있다. 이들 가운데 원적(原籍)과 현주소가 모두 안성인 사람은 변매화(卞梅花·읍내면 장기리)와 송계화(宋桂花·읍내면 동리) 두 사람이다.

 

당시 안성조합에서 활동한 기녀 수는 일찍이 경부선 철도가 가설되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수원에 이어 경기도에서는 두 번째를 차지했다. 기녀를 양성하는 학교까지 운영했던 평양권번에도 7명 밖에 되지 않는 기녀가 소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비교하면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서울을 제외한 지역을 비교해도 안성조합의 기녀 수는 전국에서 일곱 번째 규모에 달했다. 1910년대의 안성이 철도망도 연결되지 않은 지방의 소읍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조선후기부터 발달한 육로교통과 장시(場市)가 활발해 돈과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그래서 많은 수의 기생들이 활동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악디지털신문 김미연기자  gugakpeople@gugakpeop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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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2/27 [20:08]  최종편집: ⓒ 국악디지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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