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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 명창 / 삶보다 소리를 더 사랑했던 모정 이명희 명창
“내 생애의 반은 만정 선생님이 주인이고 나머지 반은 판소리 것이오“
김갑식 편집국장 기사입력  2020/10/28 [10:30]

 

▲ 고 모정 이명희 명창    © 선임기자  김태민

 

 [국악예술신문=김갑식 편집국장]

 

선생님 가신 지 이십 년 세월, 이제는

꿈에서조차 더디 오시니 더욱 그리워집니다.

 

晩汀(만정) 金素姬(김소희).

만정'이란 말은 나의 삶에서 언제나 함께한 이름이었고 나의 이름 끝에 항상 수식어처럼 같이한 이름이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딸들이 엄마를 생각할 때, 엄마의 나이가 되어 나도 모르게 엄마를 많이 닮아 있는 나를 볼 때 어느 날 문득 까닭 없는 슬픔에 저도 모르는 눈물이 묻어나듯이 만정은 그렇게 까닭없이 눈물짓게 만드는 엄마와 같은 말이었습니다.”

- 2014년 국창 만정 김소희 유품도록 추모사 중에서

 

 

본관이 성산(星山)인 모정(慕汀) 이명희(李明姬)19461223일 경북 상주군 낙동면 상촌리 719번지에서 아버지 이차경과 어머니 이일분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상주에서 과수원을 운영하던 재력가이자 지역의 유지였고 어머니는 가야금을 즐겨 타던 국악애호가였다.

 

이명희는 한량 기질이 다분했던 부친과 가야금을 타던 모친의 선천적 재능을 물려받기도 하였겠지만 당시 전국적으로 이름난 예인들의 출입이 잦았던 대구 이모님 집에 머물게 되면서 전통예술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특히 여성국극단의 인기가 높아 대구에서도 많은 공연이 이루어져 이모를 따라 구경을 가곤 했다.

 

이명희가 기억하는 이모는 대구 종로에 살던 유명한 시조인에게 시조를 배우러 다녔으며, 어머니는 가야금을 연주했다. 이 무렵 어머니는 이모 댁에서 당시 유명한 대금과 해금산조의 명인 한범수를 만나게 된다. 한범수와의 만남은 훗날 스승 김소희와 만나게 되는 각별한 인연으로 거듭난다.

 

열네 살이 되던 해 이명희는 서울 종로 3가에 있는 한국정악원으로 오게 된다. 국악예술학교에서 후학을 지도하던 양아버지 한범수가 한국정악원에 정착하면서 병치례가 잦던 이복동생 선화의 치료를 위하여 함께 서울로 이주했다.

 

 

▲ 이명희는 김소희를 스승이라기보다는 친어머니로 생각했다. 두 사람은 남이 보기에도 모녀지간이었다.     © 선임기자 김태민


스승 김소희와의 만남은 이렇게 한국정악원에서 시작된다
. 한국정악원은 한국 최초의 사립 음악교육기관으로 당대 유명 예술인의 산실이었다. 한국정악원 인근에는 유명한 국악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으므로 김소희, 박녹주, 박귀희, 성창순 등 명창들의 출입이 잦았다.

 

한범수는 어린 두 딸에게 양금을 가르쳤다. 이곳에서 이명희는 잔심부름을 하면서 틈틈이 공부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한범수는 국악에 재능을 보인 이명희를 원옥화에게 부탁하여 가아금 산조를 배우게 한다. 이 시기 이명희는 원옥화에게 가야금을 배웠고 김소희로부터 판소리, 박록주와 박귀희에게 춤과 가야금 병창을 배웠다.

 

주로 원옥화한테 가야금 산조를 많이 배웠으며, 판소리는 한국정악원 강습으로 왕래가 잦은 김소희와 친분이 두터웠던 어머니 이일분의 부탁으로 사제의 연이 시작된다. 김소희로부터 단가와 심청가 초 앞부터 선인을 따라가는 부분까지 배웠다.

 

1962춘향전으로 첫 공식무대 올라

김소희는 이명희를 야간학교인 문화중고등학교에 보냈다. 책과 가방, 수업료 등을 직접 내주며 배움의 길을 터주었다. 한편 선생들의 공연 때 무대전환이나 막간을 이용하여 잠깐씩 무대에 서기도 하였다.

 

이명희의 공식 무대는 1962춘향전’. 이듬해인 1963배비장전에서는 통인의 역을 맡았다. 창극공연 외에도 크고 작은 행사에 따라다녔다. 이와는 별개로 지옥문감나무골 공서방이라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 편의 영화출연 후 힘든 작업과 여성 국악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 등으로 스무살 되던 해 이명희는 지친 몸과 마음으로 서울을 떠나 대구로 돌아온다. 이렇게 한국정악원에서 시작된 김소희와의 7년 인연은 일단 여기서 끝난다.

 

대구로 돌아온 이명희는 이후 평범한 사회생활을 하던 중 197629세의 나이로 정춘덕과 혼인한다.

당시 여성 나이로는 늦은 편이었으나 경제적인 어려움과 가정사 등으로 혼인은 아예 생각지도 못했을 때였다. 그러나 2년에 걸친 남편의 적극적인 구애와 경제적 부담을 남편이 책임지는 조건으로 혼인을 결심하게 된 것.

 

두 사람의 혼인을 반대하였던 시집에서의 어려움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시골의 어려운 가정형편과 처음 겪어 보는 농사일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고부간의 갈등 또한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시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어려운 살림이 농사일을 해본 경험도 없고 체격 또한 왜소한 며느리가 탐탁치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난 일이라며 들려준 에피소드는 시어머니가 참 해 가져 오니라하고 점심참을 해오라는 이야기를 참외를 가져오라는 이야기로 잘못 알아듣고 참외를 사갔다가 혼이 난 이야기, 두레박으로 물푸기가 어려워 펌프를 사달라고 남편을 졸랐는데 늘 펌프를 뽑아놓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한 일, 멍석에 있는 보리를 뒤집어 버린 일 등,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수없이 많은 어려움이 당시의 삶을 짐작케 한다.

 

당시 남편은 잡지사에 다니기도 하고 작은 사업도 시도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던 상황이었다. 고부간의 갈등은 점차 심화되었고 심한 구박을 견디기 어려웠던 어느 날, 심하게 꾸중을 들은 그 날도 부엌에서 불을 때고 있다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오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자신이 처한 작금의 상태를 돌아보고 한없이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때 스승 김소희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라 돈을 벌어야겠다고 다짐한 이명희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올 결심을 하게 된다. 오랫동안 소리와 무관한 삶을 살았고 목표 없이 지내온 이 시기를 허송세월한 것으로 안타까이 여긴다.

 

무작정 아이 둘을 데리고 집을 나온 이명희는 갈 곳이 마땅히 없었다. 이모집도 가세가 기울어 기댈 형편이 되지 않았으므로 대구 대신동 인근 대원예식장 옆에 있는 자연여인숙에 방 하나를 빌렸다. 다음날 파출부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큰 집을 찾아가 무작정 벨을 눌렀다.

 

마침 안주인을 만나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하였던 곳이 바로 진영건설 사장 자택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틈틈이 가사를 도와주었고, 진영건설 사장 부부로부터 성실함을 인정받은 이명희는 이를 계기로 공사장의 참집 운영을 제안받는다.

 

이렇게 시작한 참집은 이명희에게는 생명줄과도 같이 소중한 일이 되었다. 대구 북부정류장 일을 시작으로 공설운동장, 중앙지하상가 등 규모가 큰 현장에서 남들보다 갑절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제법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당시 참집을 드나들던 손님들이 요구하는 사항들은 불평 없이 들어주었으며, 계산 또한 본인들이 장부를 기재하도록 믿고 맡긴 결과가 후덕함으로 인정받아 참집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 1990년 제16회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명창부에 출전하여 대통령상을 받기까지 이명희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를 연상시킬 만큼 극적인 반전이 거듭된다.     © 선임기자 김태민

 1990년 제16회 전주대사습놀이 대통령상 수상

이렇게 모아두었던 나머지 돈은 모두 소리공부 하는 데 투자하기로 마음먹고 서른일곱의 늦은 나이에 다시 스승을 찾아 소리공부를 청하였으나 흔쾌히 허락하지 않았다. 그동안 모아둔 경제적 여력으로 수업료도 몇 곱절을 더 드렸으나, 15년을 쉬었던 소리의 길보다 가정주부로 평범한 삶을 바랐던 스승의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굳은 결심으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이명희에게 수개월 동안 '동백타령'만 가르치며, 스스로 지쳐 포기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명희는 고모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매주 어김없이 서울행 기차를 타고 스승을 찾아 마침내 석 달 만에 정식 제자로 인정받는다.

 

어렵사리 김소희의 문하에 다시 들어간 이명희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며 지극 정성으로 스승을 모신다. 소리목을 만들기 위해 지리산 마천면의 칠선계곡으로 무작정 들어간 것도 이 무렵이다.

 

먹을 것도, 잠잘 곳도, 누구에게 의지할 곳도 없었다. 조그만 솥에다 밥을 지어먹고, 잠은 비좁은 텐트에서 쭈그리고 잤다. 비가 내리면 그대로 맞아야 했고, 바람이 불면 어디 제대로 피할 곳도 없었다.

 

유난히 겁이 많은 편이었지만 천둥과 번개라도 치면 몸서리를 쳐가며 견뎌내야 했다. 판소리에 빠져들면 끼니와 잠조차 건너뛰곤 했다.

 

이 시기에 김소희로부터 심청가와 춘향가, 흥보가를 공부했으며 그 가운데 흥보가를 집중적으로 학습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861231일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로 인정받게 되고, 당시 판소리의 황무지 같던 대구에 스승의 도움으로 판소리 전수소를 열었다. 판소리의 저변확대와 자신의 소리 학습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이렇게 정진하기를 3, 소리꾼이라면 누구나 희망하는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장원을 꿈꾸며 명창부에 출전하였으나 아쉽게 차상을 수상하게 된다.

 

자신감을 얻은 이명희는 이듬해인 1990년 제16회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명창부에 출전하여 드디어 대통령상 장원의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마침내 이명희는 춘향가'오리정 이별' 대목을 창하여 명창의 반열에 들어섰다.

 

다시 소리를 시작한 지 7년 만에 이루어 낸 결실이다. 서른 일곱에 시작한 소리를 마흔셋에 꽃피웠으니 얼마나 열심히 학습에 임하였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 이명희의 부군 정춘덕은 아내가 명창이 되기까지 음지에서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진다.    

 1992년 대구시 판소리 보유자로 인정받자 이때부터 이명희는 자신의 삶보다는 소리를 향한 일념으로 생의 미로를 걷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김소희가 19936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받자 이명희는 스승을 경북 청도로 모셔 지극 정성으로 모시었다. 평소 들꽃을 좋아한 스승을 위해 집안 뜰 곳곳에 들꽃을 심고, 어버이날에 딸인 현 정정미 영남판소리보존회 이사장의 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재롱까지 부렸다.

 

이같은 효성 때문이었을까 김소희는 2년 가까이 더 살다 1995년 소리를 이 땅에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난 뒤 이명희, 스승을 닮아 삶보다 소리를 더 사랑했던 그는 이승에서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201931673세를 일기로 멀고 먼 길을 떠난다.

 

온통 노랑바다를 이룬 개나리꽃이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었다. 

 

 

국악예술신문 김갑식 편집국장 gugakpeople@gugakpeop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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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김갑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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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0/28 [10:30]  최종편집: ⓒ 국악디지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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