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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더 좋은 세상’ 창립 돌아온 킹메이커 김무성
김갑식기자 기사입력  2020/06/17 [16:49]

[국악디지털신문 정치=김갑식기자]김무성에게서는 바람소리가 난다. 그것도 황야의 바람소리.
일테면 미국 서부개척시대, 황량한 벌판을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배경으로 생각해 보자.
기적소리보다는 그 벌판을 휘몰아치는 바람소리,그 한가운데 김무성이 서 있는 듯하다.
 


1951년 항도 부산 태생인 그는 15대부터 20대까지 부산에서만 연속 6선을 기록한 풍운의 정치인이다. 풍운이란 말이 그에게 어울리느냐 하는 문제는 독자의 몫이다.
다만 지난 정권에서의 격랑과 소용돌이를 생각한다면 지나친 표현은 아닐 듯하다.
 
김무성은 1985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로 있다가 이듬해 YS가 결성한 민주화추진협의회 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으면서 본격 정치의 길에 들어선다.
 
1987년 통일민주당 제13대 대선대책본부 재정국장, 총무국장, 당기획조정실 차장에 이어 1989년 국회 행정실장을 지냈다.


다음해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하자 의사국장, 의원국장을 1992년 YS 대선 후보추대대책위원회 총괄국장을 맡는다.
 
YS는 대선에 승리하자 그를 불러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행정실장을 명한다. 이때부터 그에게는 ‘킹메이커’라는 별칭이 자연스레 따라다니게 된다.


그 뒤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 제47대 내무차관에 이어 1996년 제15대 총선에 신한국당 공천으로 부산 남구 을에 출마 처음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2005년 민주화추진협의회 회장, 한나라당 사무총장, 2007년 제17대 대선 때 한나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공을 세웠다.


그러나 18대 총선에서 친박이라는 이유로 공천에 탈락되었는데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 뒤 한나라당으로 복귀한다.
 
2010년부터 한나라당 원내대표, 국회운영위원장,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낸 그는 2012년 19대 총선에서 다시 공천 탈락의 비운을 당하나, 18대 대선에서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총괄본부장으로 대선 승리에 큰 역할을 한다. 이를 계기로 다음해 부산 영도구에서 치러진 재보궐 선거에 당선, 다시 국회로 들어와 2014년 7월 14일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선출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무성은 거의 차기를 보장받은 보수의 대표급 정치인이었다. 여론조사마다 그는 단연 1위를 달리고 있었던 것.
 
그러나 20대 총선을 앞두고 친박, 비박의 충돌이 일어나면서 “당헌 당규를 위반한 후보에게는 공천장을 줄 수 없다“며 대표 직인을 거부했는데, 총선 결과가 참패로 나타나자 모든 책임을 지고 당대표에서 물러난다.
 
이후 ‘박근혜 최순실 사태’가 터지고, 바른정당에 합류하면서 유승민의원과 보수대통합을 논 의하다가 이견이 생겨, 독자적으로 자유한국당으로 돌아왔다.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보수통합을 모색하던 김무성은 17일 전현직 의원들과 함께 포럼 ‘더 좋은 세상’을 창립, 차기 대선에 나설 후보를 발굴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킹메이커였다가 스스로 킹이 될 수도 있었던 정치인.그러나 다시 킹메이커의 자리로 돌아온 야인.

먼 훗날 역사는 이 풍운아 김무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지금부터 새로운 기록이 쌓이기 시작했다.

김갑식기자 gugakpeople@gugakpeop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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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6/17 [16:49]  최종편집: ⓒ 국악디지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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